"보리스야, 오늘도 부부놀이 할래?"
보리스는 옆집에 사는 소녀, 라나의 밝은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늘 그랬듯, 자신이 부부놀이에서 남편 역할을 맡는 것이 어색하고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소작농으로 일하고 있는 지주의 딸인 라나의 부탁을 쉽게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거절이라는 것은 그에게 있어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놀이가 시작되면 라나가 보리스에게 명령을 내리고, 보리스는 그 명령에 따랐다.
"남편, 오늘 늦게 들어왔으니 내가 화가 나 있어요! 부부싸움이 뭔지 알죠?"
라나가 어색한 대사를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 말했다. 라나가 휘둘러대는 부지깽이를 바라보며 보리스는 속으로 걱정이 밀려왔다. 저렇게 휘두르면 자칫 라나가 다칠지도 모르는데...
"싸우면 안 되지... 부부는 화해를 해야 하는 거야, "
보리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평소 자신의 부모님의 끊임없는 다툼이 마음속 깊이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 상처와 분노가 그녀의 이성을 잃게 했다.
"아니야, 우리 엄마 아빠는 항상 싸워!"
라나는 갑자기 화덕용 부지깽이를 꺼내 화단에 버려진 병을 향해 휘둘렀다. 핏 하는 소리가 나며 무엇인가 보리스의 이마를 스쳤다. 처음에는 따끔했지만 이내 시원해졌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세상이 보이지 않자 손을 들어 눈을 만지자 뜨끈한 액체가 손에 묻어났다. 병이 산산조각 나면서 파편이 튀어나와 보리스의 이마를 맞췄던 것이다. 그 순간 극심한 고통에 보리스는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이마를 움켜쥐었다. 찢어진 이마에서 뚝뚝 흘러내린 피가 순식간에 바닥을 붉게 물들었다.
"라나... 눈이... 눈이 안 보여..."
그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이 이런 결과를 일으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6살 소녀 라나는 쇠부지깽이를 던진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겁에 질려 있었다.
"나... 나... 나는...."
보리스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고 핏물로 보이지 않던 눈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자 자신의 주변이 온통 피로 뒤덮여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내 이마를 쥔 채 자신의 집으로 비틀거리며 달려갔다. 보리스의 울먹이며 부르짖는 소리에 어머니가 급히 달려왔다.
"악! 보리스! 보리스, 이게 무슨 일이니? "
어머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보리스의 아버지가 소작농이어서 집안은 항상 바쁘고 형편은 어려웠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부축하며 최대한 빨리 마을의 의원에게로 보리스를 데려갔다. 보리스를 안고 달리는 어머니의 눈에서도 눈물이 그렁했다. 어머니에게 안기고부터 그의 의식은 희미해졌다.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가...
"궤매야겠군요. 상처가 깊지는 않지만 꽤나 길어요."
의사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고 그의 이마를 닦아내고는 바늘로 그의 이마를 궤매기 시작했다. 이마는 다른 살 보다 두꺼워서 바늘이 지날 때마다 '뚝 뚝' 하는 소리가 낫고 어둑한 병실의 창에서 들어오는 햇살의 온기와 밝은 느낌만이 보리스의 감은 눈이 느낄 수 있는 전부였다. 그날 그의 이마에 난 상처는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하지만 몸에 남은 상처보다는 무언가 마음에 남은 상처가 더 컸다.
이틀이 지나자 보리스는 이마에 붕대를 붙인 채 라나를 찾아갔다. 하지만 라나는 어째서인지 보리스를 만나주지 않았다. 어린 보리스는 이유를 알지 못했고 또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소작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에게서 라나 가족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라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가 더욱 좋지 않아 져서 결국 큰 딸인 라나의 언니 타샤와 함께 어머니는 본가로 떠났고, 이제 라나마저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보리스는 라나가 떠나가는 마차가 곧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허겁지겁 언덕을 올랐다. 언덕에 올라선 보리스는 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져 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생애 처음 영원히 남을 상처를 남겨준 그녀였지만 라나를 향한 마음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보리스는 눈물을 글썽이며 크게 외쳤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라나~ 나는 괜찮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마차는 그대로 사라져 갔고 한 참을 서 있던 보리스는 그대로 천천히 언덕을 내려와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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