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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알정보

애국가가사

by BADAYO2 2020.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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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임금이

이리 말했습니다.

황제는 이르노라.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왕업(王業)을 이어 받들어

임어(臨御)한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신 정령(維新政令)에 관하여

속히 도모하고 여러모로

시험하여 힘써온 것이

일찍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되

줄곧 쌓인 나약함이 고질을 이루고

피폐(疲弊)가 극도(極度)에 이르러

단시일 사이에 만회(挽回)할 조처를

바랄 수 없으니, 밤중에 우려(憂慮)가 되어

뒷갈망을 잘할 계책이 망연(茫然) 한지라.

이대로 버려두어 더욱 지루하게 되면

결국에는 수습을 하지 못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위탁하여

완전할 방법과 혁신(革新)의 공효(功效)를

이루게 하는 것만 못하겠다.

 

 

 

짐이 이에 구연(瞿然)히 안으로 반성하고,

확연(確然) 히 스스로 판단하여

이에 한국의 통치권(統治權)을

종전부터 친근하고 신임(信任)하던

이웃나라 대일본황제께

양여(讓與)하여

밖으로 동양(東洋)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도 민생(民生)을 보전케 하노니,

오직 그대 대소 신민(大小臣民)들은

나라의 형편과 시기의 적절함을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동요하지 말고,

각각 그 생업에 편안히 하며

일본 제국(日本帝國)의 문명 신정(文明新政)에

복종하여 모두 행복을 받도록 하라.

짐의 오늘 이 거조는 그대들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대들을

구활(救活)하자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 신민(臣民) 등은 짐의 이 뜻을 잘 체득하라.

 

 

순종 4년 경술(1910) 7월 25일
(병인, 양력 8월 29일 월요일)
맑음.
승정원일기 마지막 날의 기사
이 기사를 작성한 이후
승정원은
바로 한국통감부에 의해 전격 폐지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달 후에 세워진다.

 

[나무 위키 출처]

 

 

왕이 말했다.

피곤하고, 나라의 미래는 답이 없어서

능력 있는 이웃나라 일왕에게

이 나라를 떠 넘길 것이니,

너희 백성들은 내가 결정한 일에 

번거롭게 동요하지 말고

하던 일 하면서 일본제국에

복종하면 행복해질 것이다.

이것은 내가 너희를 버린 것이 아니고

구하려고 선택한 길이니

백성들은 그저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여라......

 

대충 이런 생각을 가진

왕은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쳐 넘겼습니다.

이날이 경술국치일입니다.

 

이 날 이후로 대한민국 애국가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 멜로디에

작자미상의 가사로 불리던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죠션사람 죠션으로 길이 보죤하세!"의

뜻을 잇지 못하고 

"죠션사람 일본인으로 길이 보죤"할 뻔

하였으며, 대한제국에 들어와서는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로 대체되어

애국가가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1919년 3.1 운동과

1940년 12월 20일 이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애국가로

역시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의

곡조에 맞춰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현재의 애국가 3절의 가사는 당시

없어서 4절에 해당되는 가사가

3절로 쓰이던 시절이었습니다.

 

2절 가사 중에 '바람서리'가

'바람 이슬'로 불렸었습니다.

 

출처 나무위키

 

올드 랭 사인은 국내에서 

'작별'이라는 제목으로 번안되어

음악 교과서에도 실려있습니다.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로

시작되는 그 곡입니다.

 

현재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는

안익태가 작곡하였고

1940년 12월 20일부터 사용되어

공식적으로 국가로 명문화한 시점은

1942년이었습니다.

하지만 헌법으로 애국가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관습헌법의 개념을 인정하는

국가로 무궁화를 국화로,

서울을 수도로 인정하는 것 또한

관습 헌법으로

영국 왕실 찬가인 '갓 세이브 더 퀸'이

영국 헌법상 국가로 지정되어 있지 않지만,

사실상 영국 국가로 통용되는 것과

같습니다.

 

 

애국가의 가사자와, 작곡가는 여전히

논란이 많습니다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배재학당을 비롯한 전국의

민족학교에서도 이 애국가가

불려졌습니다.

이에 대해서 임시정부 당시에도

작사자 친일 논란이 있었고,

네 차례에 걸쳐 개작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이

"우리가 3.1 운동을 무엇으로 했는가?

태극기, 선언서, 애국가로 했는데

그 작사자가 왜 문제인가?"라고

일갈하여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친일이냐 아니냐는 당시에는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에,

영원한 논란거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의 국력이 강건하지 못하고,

책임 없는 지도자의 말도 안 되는

결정이 얼마나 큰 혼란과

상처를 오랫동안 남기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의 사례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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